백제 왕 계보 (중) 16대 진사왕 ~ 25대 무령왕

백제왕 계보, 상편에서는 시조 온조왕부터 15대 심류왕까지의 중요한 사항들을 알아보았는데요. 원래는 상하 2개면 의자왕까지 다 끝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네요. 문장이 길어져서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은 글을 중편으로 편성해서 16대 진사왕부터 25대 무령왕까지 보내드리고 다음 하편에서 연재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위편과 마찬가지로 백제왕 계보의 내용은 삼국사기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되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자, 그럼 왕씩 볼까요?

제16대 진정 사왕(385~392)심식 왕이 불과 1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 동생인 마사고 왕이 제16대 왕에 즉위했습니다. 심식 왕이 태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이 왕위를 계승한 것입니다.이에 대해서 다양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어 일본의 역에서는 마사고 왕이 심식 왕위를 탈취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심식 왕의 불교 수용에서 기성 귀족의 반발이 거셌던 것은 사실이므로 이와 관련한 권력 암투가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됩니다. 즉위 당초 고구려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규모 요새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재위 8년간 요충의 세키 미국 성 등 많은 영토를 고구려에게 빼앗긴 뒤 국력이 크게 약화됐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 왕이었어요. 진나라사 왕은 392년 11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본 역사 책에는 역시 살해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17대 아신 왕(392~405)삼국 사기는 심식 왕의 태자가 젊은 진나라사 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진나라사 왕이 죽으면 다시 심식 왕의 아들인 아신 왕이 왕위에 올랐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5심식 왕 → 16진사 왕 → 17아타 신왕의 왕위 계승에는 이런 여러 의혹이 남아 있습니다. 아하 신왕 시대는 고구려 광개토 왕의 정복 전쟁이 더 활발했던 시기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6년(397년)에는 왜국과의 우호 관계를 심화시키고 태자 전지(18대 왕)을 파견했습니다. 태자까지 파견하고 일본과의 우호를 다진 것을 보면 고구려의 위협으로 백제가 매우 긴박한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 왕세자비는 아하 신왕의 사후에야 돌아왔습니다. 재위 기간 14년 서기 405년 9월에 돌아가셨습니다.

18대 전지왕(405~420) 아신왕이 죽었을 때 세자인 예지는 여전히 일본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전지의 둘째 딸 흥혜가 왕의 역할을 대리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내동생 설래가 반란을 일으켜 흥해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전지왕은 자신의 세력이 변란을 완전히 수습한 후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 후에는 솔레이계 귀족들을 완전히 숙청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재위기간 16년간 6좌평의 수장으로 상좌평을 새로 마련하여 중국의 동진 및 일본과의 우호관계 강화에 역점을 둔 공이 돋보입니다. 서기 420년 3월에 사망했습니다. 치리 기간 16년이었습니다.

19대 옛 이신왕(420~427) 전지왕의 장남입니다. 삼국사기는 전지왕이 420년 3월에 즉위하여 427년 8월에 사망했다는 기록만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책을 참고하면 옛 신왕은 매우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마키키 씨 등이 세력을 키워 국정을 멋대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제20대 유례 왕 삼국 사기는 유례 왕에 대해서 2가지 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옛 이 노부 왕의 장남이라는 말도 있으면 전 사토시 왕의 서자라는 설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중 전 사토시 왕의 서자였다는 설을 받아들이면 옛 이 노부 왕의 재위 기간이 짧은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근거로 다음 왕의 유비 왕에게 왕위를 박탈당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삼국 비교 고구려:장수왕 백제:유례 왕 신라:눌지 마립간 정도의 삼국 관계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본격적인 남하 정책을 펼치면 백제의 비유 왕과 신라의 눌지 마립간이 힘을 합쳤습니다. 이에 나제 동맹과 하잖아요. 아까 본 제13대 가까운 초 옛 왕도 신라 중 물마 입장과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를 제일차 나 경제 동맹과 시각은 비유 왕+눌 지마 입장의 화친을 제이차 나 경제 동맹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습니다.『 삼국 사기 』은 비유 왕 7년(433)7월 양국 간의 결혼 동맹이 맺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활발하게 했습니다. 치세 후반에는 굶주린 백성이 신라로 달아난다는 국가적 위난이 있고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사가 피폐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재위 기간 29년, 서기 455년 9월에 사망했습니다.

21대 개로왕(455~475) 개로왕은 비유왕의 장남으로서 정말 힘든 왕이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 때 군대를 이끌고 한강 방어에 나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 왕입니다. 동맹국 신라가 급히 원군을 파병했지만 이미 개로왕이 전사한 뒤였습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백제는 치명상을 입었고 한강을 고구려에 빼앗김으로써 수도 한성도 상실되었습니다. 개로왕 21년(475) 9월의 일이었습니다.제22대 문주왕(475~477)개수로 왕의 아들입니다. 고구려가 한강을 넘자 신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한 장본인입니다. 신라군과 함께 수도 한성에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전사한 뒤였습니다. 한성을 고구려에 내주며 눈물을 흘리며 남의 웅진(지금 공주)에 도읍을 옮겨야만 했어요. 천도의 길에는 동맹국 신라 군대가 호위를 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6사헤이 속에서는 솔루션 오카와 곤지(문주왕의 동생)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권력 다툼이 거세지면서 헤그이 곤지를 살해했습니다. 해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객을 보내고 문주왕까지 살해하고 백제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합니다. 이로써 백제는 그동안의 왕족 부여 씨가 물러나고 솔루션 씨의 세계가 열립니다. 재위 불과 2년 서기 477년 9월에 사냥을 떠나고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습니다.제23대 삼근왕(477~479) 문주왕의 장남입니다. 나이 13살로 어린데다 해구가 독점적 권력을 휘두를 때라 나라가 너무 어수선했어요. 나라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해구가 결국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란까지 일으켰습니다. 이때 해구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 것은 왕비족이라 할 수 있는 진씨세력이었습니다. 진씨가 해씨(해구)를 제압했지만 백제는 거의 내전 상태와 다름없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재위 2년, 서기 479년 11월에 사망했습니다. 13세 때 해씨의 옹립으로 즉위하여 15세 때 사망한 것입니다.제24대 동성왕(479~501)앞에서 22대 문수 왕의 동생이라고 해서 곤지이라는 사람을 소개했잖아요.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입니다. 바다 씨 토벌에 성공한 천 씨의 지지로 왕이 되었습니다. 동성왕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며 국내 세력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점을 이용하기 때문에 동성왕을 옹립한 것입니다. 왕권이 극히 약한 핸디캡을 만회하기 때문에 동성왕은 새 도읍 웅진(공주)기반의 귀족 세력과 결탁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천 씨 등, 한성으로부터 함께 남하한 기성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 중국의 남제와 외교를 하고 고구려의 남침에도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와 맺었던 나제 동맹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때 신라의 왕은 코지마 타츠 간이었지만 이른바 혼인 동맹을 제안했습니다. 서로 왕족끼리 결혼하고 동맹을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동성왕은 15년(493년)신라 왕족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됩니다. 이를 결혼 동맹 혹은 혼인 동맹이라는 전술한 이차라 경제 동맹에 대해서 삼차 나 끝난 동맹과 부릅니다. 실제로 고구려의 남침을 막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요즘 신하의 인사 문제에서 동성왕에 불만을 품은 흰색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동성왕 재위 23년(501)11월에 사냥을 나갔는데, 백작들이 자객을 보내동명왕을 시해했습니다.제25대 무령왕(501~523)삼국 사기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차남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왕이 어릴 때 즉위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때 40세인 점을 감안하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문헌을 보면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곤지은 문주왕의 동생이라고 몇번 나온 인물입니까? 이런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하면 무령왕이 동성왕의 살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황이 꽤 많이 나옵니다. 즉위 과정은 어차피 망해 가는 백제에서 한동안 중흥의 번창한 왕입니다. 많은 사회 개혁도 해냈다. 고구려와의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듭하고 선제 공격을 가세했습니다. 중국과 외교를 여는 등 실적이 돋보입니다. 재위 23년 서기 523년 5월에 돌아가셨습니다.백제왕의 계보, 원래는 상하편으로 나누어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문장이 길어져서 부득이하게 여기서 마감이 되어서 따로 하편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26대 성왕부터 마지막 31대 의자왕까지의 역사는 다음 번에 이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글의 배경에 올린 사진은 공주 공산성의 모습입니다. 개로왕이 전사하고 아들 문주왕이 웅진(충남 공주)으로 도읍한 뒤 쌓은 성입니다. 웅진공산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는 한성에서 함께 남하한 기성귀족세력과 웅진지역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서울귀족의 알력이 심각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산성을 여행할 기회가 있을 때 백제의 이런 역사도 맛보면서 되돌아보면 더욱 유익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아래쪽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현자>백제왕 계보(하) 26대 성왕~마지막 31대 의자왕 상중하편에서 연재하는 백제왕 계보 오늘 다 끝났네요. 전적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서… blog.naver.com백제왕 계보(하) 26대 성왕~마지막 31대 의자왕 상중하편에서 연재하는 백제왕 계보 오늘 다 끝났네요. 전적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서… blog.naver.com백제왕 계보(하) 26대 성왕~마지막 31대 의자왕 상중하편에서 연재하는 백제왕 계보 오늘 다 끝났네요. 전적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서… blog.naver.com공산성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53-51공산성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53-51공산성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5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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